[식탁의 주도권을 되찾다. 2편] 밥상 위에서 사라진 자율성 (부모님께 받은 가장 위대한 유산)

위대한 유산은 은행 계좌가 아닌 밥상 위에 있다

흔히 ‘유산(遺産)’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두툼한 통장 잔고나 도심 한복판의 번듯한 부동산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혀끝을 자극하는 초가공식품이 골목마다 범람하는 이 시대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유산은 자산 증서 따위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매일 마주하는 밥상 위에서 조용히 전수되는 ‘자율적인 식습관’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가 제공하는 음식과 환경을 통해 세상을 맛보고 경험하며, 그 과정에서 뇌와 미각의 감각적 기준점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기준점은 성인이 되어 홀로 세상에 던져졌을 때, 자본이 정교하게 설계한 편의성의 함정과 자극적인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됩니다. 거창한 철학이나 값비싼 영재 교육보다, 어릴 적 무심코 마시던 물 한 잔과 담백한 식재료의 맛이 한 인간의 평생을 지배하는 건강한 사유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망각하곤 합니다. 오늘은 조금 개인적인 회고를 통해, 부모님이 남겨주신 이 작지만 위대한 유산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1. 살갑지 않았던 부모님이 남겨주신 뜻밖의 방파제

돌이켜보면 저와 부모님의 관계가 매 순간 드라마처럼 다정하고 살가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느 가정처럼 세대 간의 갈등도 있었고, 무뚝뚝한 침묵이 흐르는 시간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우리 집이 이른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대단한 부자도 아니었기에, 경제적으로 넘치도록 풍족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제 스스로 가정을 꾸려 아이들을 기르다 보니, 비로소 부모님을 향한 깊고 묵직한 감사의 마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제게 대단한 재력을 물려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평범해서 당시에는 그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단단한 식습관의 틀’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리고 현재의 제 삶을 관통하는 결정적인 습관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마실 것’에 대한 엄격하리만치 담백했던 집안의 규칙입니다. 어린 시절 저희 집 냉장고에는 그 흔한 콜라나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가 단 한 병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갈증이 날 때면 으레 주전자에 끓여 식힌 보리차를 들이켰고, 때로는 냉장고에 있는 우유를 마시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당시에는 남들처럼 달콤한 오렌지 주스나 톡 쏘는 탄산을 마음껏 마시지 못하는 것이 내심 서운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이 물와 우유라는 지극히 단조로운 음료의 기억은 훗날 저를 자본의 거대한 사육장으로부터 건져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2. 물과 우유가 만들어낸 감각의 주도권

현대 식품 산업이 인간을 지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액상과당’을 통한 미각의 교란입니다. 씹을 필요조차 없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달콤한 음료들은 뇌의 보상 회로를 즉각적으로 자극하여 더 강렬하고 잦은 단맛을 갈구하게 만듭니다. 어릴 때부터 이러한 자극에 노출된 미각은 성인이 되어서도 결코 자연의 담백한 맛으로 회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물과 우유만을 마시며 자랐던 제 미각은,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인공적인 자극에 오염되지 않은 채 ‘영점 조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담백한 미각의 기준점은 성인이 되어 수많은 외식 문화와 배달 음식의 홍수 속에 던져졌을 때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남들이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으로 자극적인 당 음료와 탄산을 습관적으로 들이켤 때, 저는 그것들이 주는 일시적인 쾌락보다는 입안에 남는 끈적하고 불쾌한 뒷맛을 먼저 느꼈습니다. 굳이 인내심을 발휘하거나 억지로 참아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조차 필요 없었습니다. 애초에 제 몸과 감각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습관이 가진 진정한 무서움이자 위대함입니다.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탄산 없는 식탁’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혀끝을 방어하는 최전선의 요새가 되었고, 나아가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을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신체적 주도권’을 확립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3. 무의식으로 대물림되는 식탁의 기준점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

더욱 놀랍고 감사한 것은, 제가 부모님께 은연중에 물려받은 이 긍정적인 유산이 이제는 제 아이들에게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아이들을 키우며 억지로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엄격한 통제를 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빠인 제가 평소에 액상과당이 듬뿍 든 음료를 멀리하고 생수나 차를 가까이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삶의 당연한 기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부모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바깥세상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도대체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완벽하게 감시할 수는 없습니다. 가끔은 편의점에 들러 유행하는 자극적인 음료를 호기심에 사 마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에서 담백한 맛의 영점을 맞추고 자란 아이들은, 결코 아무런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나쁜 식습관에 휘둘리거나 자본이 만든 값싼 단맛에 중독되지 않을 것이라는 굳센 믿음 말입니다. 밖에서 잠시 자극적인 맛에 노출되더라도, 결국 아이들의 혀와 뇌는 집에서 경험했던 그 편안하고 안전한 미각의 고향으로 연어처럼 회귀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은 주식이나 아파트 평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이 들이미는 파괴적인 편리함에 저항하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건강한 감각과 사유의 힘’입니다. 오늘 저녁, 우리 집 식탁 위에 놓인 반찬과 물 한 잔이 훗날 아이가 거친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든든한 방패가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살갑지 않았던 제 부모님이 저에게 그러하셨듯, 저 역시 우리 아이들이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가슴 깊이 고마워할 수 있는 작지만 단단한 식탁의 주도권을 묵묵히 물려주고자 합니다.


starsign16: 혀끝의 찰나적인 달콤함이 아닌, 삶의 흔들리지 않는 주도권을 되찾는 지적인 사유를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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